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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아르헨티나의 독립선언 200주년 기념일에 문란한 성문화 이야기

bernabe 2010. 5. 24. 17:48

 

 

일단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노래 부르는 장면 Play...

한국인에게는 별루 감동이 없는 장면이지만...

그들은 열광하고 있으니 한번 들어나 보면서 글을 읽어 내려가자..^^

 

신사의 나라 영국...

영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젠틀한 신사들과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이다.

그리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는 이미지가 쉽게 떠오른다.

허나 그들이 세련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부유한 귀족들이었기 때문이었고,

당시 빈곤층이었던 노동자들의 생활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 무산

계급자인 노동자들의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

그러나 당시 영국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보다도 더 급속하게 변화중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산 계급자들의 무질서한 성생활이었다. 즉,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무산 계급자의 생활은 동물,

가축과도 다를바 없는 비참함의 전형이었던 것 같다. 특히, 1870년대 영국 도시에서는 상황이 그야말로

암담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동물처럼 방치되었음은 물론, 정부로 부터 어떠한 배려도 받지 못하였다.

이에 무산 계급자들의 성 생활은 방종할 수 밖에 없었고, 이미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며, 욕구가 생기면 해치워버리는 즉흥적이고 문란한

섹스 심리만이 만연해 있었던 것이었다.

 

가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가옥안에 여러명이 살면서 하나의 침대위에서 부부,

자식들이 다 같이 떠들며 잠드는 형편이었다. 이에 아이들은 자연스레 부모의 성생활을 가까이 보며

자라게 되었고, 성에 대한 어떠한 예절이나 도덕관념도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아이들은 일찍이

성에 눈뜨는 탓에, 10대 때부터 남성 노동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매춘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884년 월리암 스테트 (난 이사람이 얼마나 유명한지, 뭐했던 인물인지, 당췌 모르겠다..

원작에 그리 적혀있어 옮긴다.)는 당시의 끔찍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 1870년때 까지는 연애는 거의 음탕했다. 어떠한 수치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시대만큼 근친상간

범죄가 많은 적은 없었다. 부모와 자식간에 강간과 임신...(에구 끔찍해라 ㅠ.ㅠ..)  그리고 형제 자매끼리

12세도 채 되지 않아 임신한 경우도 흔했다. 이에 방 하나에 하숙인을 두었을 때는 풍기가 더욱 문란하였다.

노동에 시달려 숙면을 취한 여공들은 잠결에 하숙인이 몸을 건드려도, 누가 자기를 범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남편인지, 하숙인인지 전혀 몰랐다."

 

워낙에 문란했던 탓에 하루에도 몇번씩 이집 저집에서 사생아들이 태어났고, 태어난 아이들은 즉시 길가에

버려졌다. 임신한 어떤 여성들은 약을 먹어 낙태시켰다. 그마저도 돈이 없는 이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핏덩이들을 갖다 버리기 일쑤였던 것이었다. 1906년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자 그동안 이들을 방치해오던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무산 계금의 빈곤한 생활환경개선, 미성년자 보호등의 사회 복지 정책을 실시하여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리 큰 성과는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과거 영국의 문란한 분위기가 빈곤층을 타락시킨 것처럼, 오늘날에 벌어지는 극악한 범죄들 또한 환경적인

요인이 크다. 아무리 묻지마 범죄 일지라도 이세상에 저혼자 태어난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들 또한 환경에

의해 범죄자가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부모로 부터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았다면, 과연 범죄자가 외었을까,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남을 그렇게 무참히 죽였을까.. 그렇지 않다. 결국 인간을 만드는 건 환경이기에 남성들은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가정에 충실히 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글을 옮겨 보았다.

(-서양 근현대의 은밀한 사생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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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5월 25일은 아르헨티나의 독립선포일이고 정식 독립은 그로부터 6년후 1816년 7월 9일에

이루어졌다...

1810년 당시 독립을 선포하였지만 아직 국가의 기틀이 확립되지 못하였고,

또한 이무렵 영국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을 스페인 왕정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급조된

민병대 병력으로  부에노스 시내에서 시가전으로 영국군을 물리쳤야했다.

끝없이 파상적인 공격을 해오던 영국은  신대륙의 독립국으로서 영토확정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함을 틈타

말비나스(영국에서는 포클랜드라한다. 일본녀석들이 독도를 죽도라고 우기듯이...)에 닻을 내렸다..

그후 말비나스에 대한 문제가 꼬이고 꼬인상태에서 지난 수십년간 외교적인 강국들이 영국의 편에

서 있었기에 상대적 약자였던 아르헨티나인들의 외침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축구만이 그들에게 복수를 할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즘도 아르헨티나인들이 자주 이야기 하는 신의 손 마라도나의 골(자랑스런골이 아닐것 같은데...)을  

유별나게 더 통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좀 얄미운 짓을 하는 코미디나 유머가 유행하던

시절에 그것을 재밌어 하던 대중들의 마음과도 아마 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일본의 강제 점거로 지배를 받아오다 독립하였으므로 일본을 아직도 미워하고 있는게 당연하나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사이는 돈독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중들은 오로지 영국만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영국...

역사적으로 별로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테마를 혼자만 필이 꽂혀서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난 쌩뚱맞기로는 일류인 것 같다..ㅋㅋㅋ

 

내일은 5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에 있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도 행사를 준비한 모양이니

그곳에 참석해서 사진이나 몇장 건져서 교민 신문사에나 전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