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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소사

bernabe 2009. 10. 18. 19:28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고난받는 이들의 어머니'라 불러도 나무랄 사람이 없는 메르세데스 소사...

전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녀의 타계소식이 지난 10월 4일 한국에 까지 알려지자

전 그때 부터 소사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현대사를 공부하던 중에 우연히 접하게 된 그녀에게 빠져 있던

저에게는 그녀의 사망소식은 제가 당장 무슨 일을 해야할지도 잊게 만들 만큼

충격이었습니다.. 직접 얼굴 한번 본일도 없었는데...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꼭 한번은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리라고 마음 먹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는데...ㅠ.ㅠ

 

그녀의 사망소식이 알려진지 보름이 지나서 이제 생뚱맞게 이글을 올리는 것은

그녀에 대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인터넷에 올라 있는 여러정보들을 취합하고

검토하고 수정하다 보니 이제야 정리가 되어서 입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인생은 한마디로 거룩.. 그 자체입니다..

혹독한 군부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었던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태어났습니다.

백인 중심 사회인 아르헨티나에서 인디오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였기에

그녀가 부른 노래의 전달력이 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사가 나고 자란 아르헨티나는 한국에서는 많이 불행한 나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982년 12월 민주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근 170년 간

잦은 군사쿠데타로 몸살을 앓아온 나라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그런 긴 기간 동안이 불행한 역사로 한국에서 치부하는 것은

뭔가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듯 합니다.

실제  정치적 암흑기는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그 시기에 민중가수로 활동한 메르세데스 소사이기에

그녀의 존재가 더욱 절실했던 것 같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국민의 92퍼센트 가량이 유럽게 백인이고 나머지가 인디오와 혼혈인, 일본등 아시아 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인디오들은 16세기의 스페인 침략을 겪으면서 이후 백인 농장주들의 착취와 그들을 지원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정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후안 페론이 사망한 뒤 1976년 초 군사쿠데타를 거쳐 정권이 비델라 군부로 넘어가면서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포정치가 시작 되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탄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시기에 민중의 삶과 꿈은 절망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습니다.

 

1977년부터 군사독재가 종식되는 1983년까지 군부의 인권탄압으로

3만여 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이것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정치상황은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에도 그대로 나타났지요.

반독재와 저항의 노래들이 그 역사를 아프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메르세데스 소사는 좌절 속에서 희망의 노래를 울려 퍼지게 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 민중들에게, 더 나아가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에게 어두운 시대를 이겨내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소사의 노래는 정직했고, 신념이 있었습니다. 군부에 맞선 그녀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소사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 방송될 수 없었으나 민중들의 사랑은 군부독재가 휘두른 칼날 위에서도 뜨겁기만 했습니다.

 

소사에게는 늘 비밀경찰이 따라붙었고, 자신이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고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래,

반전평화 등의 노래들을 잇달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존 바에즈, 밥 딜런 등 세계 정상급 뮤지션들과 함께 반전평화 콘서트를 열었고,

국제사면위원회 콘서트에 참여하여 정의와 인권을 노래로 호소했지요.

 

한국에서 그 시절에 젊은 날을 보내셨던 분들은 아마 문득 김민기 양희은씨등 포크가수들의 발표곡들이

저항운동의 대표곡으로 지목되어 방송 금지 되었던 것을 기억나실 겁니다..

아르헨티나는 당시 한국에 비해 그 독재의 강도가 더 깊었던 듯 싶습니다..

 

 그러나 소사는 믿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 노래 '모든 것은 변하네'(Todo Cambia)에서

 소사의 노래에는 '언어'의 벽이 없는 것을 확인 시켜줍니다. 번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목소리로 언어를 녹였고, 심금을 울리는 서정을 표현했습니다.

 

세계인이 사랑하고 감동했던 이유...

그녀는ㄴ 민중의 영혼을 일깨우는 목소리만으로 노랫말에 담긴 정서를 남김없이 전달할 줄 아는 소리꾼이었습니다.

소사의 노래는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주며,

때로는 우렁찬 울림으로 청중들에게 신념을 전달하여 줍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다가도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처연히 솟아나는 이웃들의 슬픔에 낮게 엎드려 다가간 노래.

한 영혼이 흐느끼는 찬란한 슬픔과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녀의 노래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메르세데스 소사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 께추아족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인디오의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을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 그것은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온 여인에게 바치는 무한한 존경과 애정의 표시였습니다.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79년 1월,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됩니다. 그녀가 치른 망명 생활은 고독과 아픔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소사는 좌절하지 않았지요. 록과 재즈 등 꾸준히 새로운 음악을 실험했다. 하지만 음악인생의 모태가 되었던 안데스 음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포크로리카'(Folklorica)는 그녀에게 영혼과 같은 존재였고. 1960년대 초 소사가 참여한 누에보 깐시오네르 아르헨티노(Nuevo Cancionero Argentino,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정신을 잇는 것이며, 조국의 암울한 현실과 민중의 고통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게 된 음악의 뿌리였기 때문입니다.

 1982년, 마침내 소사는 망명 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고,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무너졌습니다. 귀국 후 한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무대였다. 꼭 기억되어야 할 노래가 있지요. 비올레따 빠라의 원곡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노래, 홀을 가득 메운 극장 안에서 군부독재 시대 억눌려 살아왔던 민중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소사가 불렀던 노래, 바로 풍부한 서정과 큰 울림으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명곡

'삶에 감사합니다'(Gracias a la Vida). 입니다.

 

소사는 말합니다.

"나는 전 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저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것이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소사를 가리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이라 부르기도합니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따 빠라의 '삶에 감사합니다'(Gracias a la vida), 아따우알빠 유빵끼의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Guitara di melo tu), 아리엘 라미레스의 '모든 것은 변하네'(Todo Cambia), '알폰씨나와 바다'(Alfonsina y el Mar), 빅토르 에레디아의 '살아가는 이유'(Razon de vivir),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유니콘'(Unicornio), 레온 히에꼬의 '단지 하느님에게 바라는 것은'(Solo le pido a Dios) 등 불후의 누에바 깐시온 노래들을 완벽하게 해석하여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또한 소사는 1986년, 아리엘 라미레즈가 작곡한 인디오 미사곡 '미사 끄리오야'(Misa Criolla) 명반에 수록된 노래를 불러 흠잡을 데 없는 예술의 완성도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다섯 개로 구성된 미사곡의 선율만으로도 안데스 민속음악과 카톨릭 종교음악의 혼을 느낄 수 있지만, 인디오 영혼을 달래주는 소사의 절창에는 가슴 저미는 애달픔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가 특히 그렇습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모든 노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심장을 녹이는 뜨거움이 있었고, 서정이 넘치는 풍부한 표현력, 고난의 연대를 헤쳐 온 파란만장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단아한 목소리, 한시도 떠나지 않는 인디오의 애환, 강렬하고 우직한 힘, 바로 소사의 음악세계였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한 그의 목소리는 이제 잠들었습니다. 그의 음악이 영원하기를. 이제 당신은 천사들의 합창에 참여하겠군요. 그곳에서 이 땅을 굽어보세요. 우리는 당신의 음악을 영원토록 간직하리다.”

21세기,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이 다시 지배하고 있는 이 땅의 비참에 대해 여기선 더 이상 구구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로지 삶에 감사하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향유하리라는 굳은 의지를 저 선율에 담았을 뿐이라고...

 

50년 이상을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노래한  누에바 깐시온의 최고 해석자, 고난받는 이들을 노래로 달래준 어머니의 존재, 그녀에 대한 화려한 수사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소사를 아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과 사회,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이 그녀의 음악세계를 낳은 것이라고.

아르헨티나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민중과 부대끼며 영혼의 목소리로 세상의 분노와 슬픔을 어루만져 주던 작은 거인.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이 민중의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해와 성찰을 품었다고 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 건가요?

 

 오늘도 유튜브에 올라오고 있는 애도의 댓글과 추모사가 세계 각국어로 끝도 없이 올라 오기에

다시 한번 그녀의 크기를 느끼게 됩니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잠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음악이 영원하기를...

이제 당신은 천사들의 합창에 같이 참여하시겠군요..

그곳에서 우리를 굽어보세요..

이제 우리들은 당신의 음악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감상해 보시려면 아래 노래 제목을 클릭해 보세요..

저희 카페에 오래전에 올려 놓았던 노래들인데 먼저 감상해 보시고

빠른 시간내로 다른 노래들은 저작권에 위배 되지 않는 선에서 선곡하여 올려 놓겠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앨범 깐또라는 아마 한국에서도 발매를 시작했으니 아마 인터넷에 올리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 밖의 곡들은 현재는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메르세데스 소사 노래 감상하기..

    *노래 제목 클릭 하세요*

 

1. Gracias a la Vida.

 

2. Alfonsina y el Mar.